에토 다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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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토 다카미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25년 미야자키현에서 태어나 2007년 사망했다. 1955년 미야자키현 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건설상, 운수상, 총무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자유민주당 내 파벌 활동을 했으며,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과 일본의 전쟁 범죄 부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1995년 총무청 장관 재직 시 한일 병합 조약 옹호 및 식민지 시대 긍정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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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토 다카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일 | 1925년 4월 10일 |
| 출생지 | 일본 미야자키현휴가시 |
| 사망일 | 2007년 11월 22일 |
| 사망지 | 베트남 호찌민시 |
| 출신 학교 | 미야자키 농림 전문학교 수의축산학과 (현 미야자키 대학 농학부 수의학과) |
| 배우자 | 에토 테이코 |
| 자녀 | 장남 에토 타쿠 (제63대 농림수산대신)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무파벌 → 무라카미파 → 에토・카메이파) |
| 칭호/훈장 | 정3위 [[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훈1등 욱일대수장 가도카와정명예정민 |
| 경력 | |
| 전직 | 미야자키현의회 의원 |
| 정무직 | |
| 직책 | 제16대 총무청 장관 |
| 내각 | 무라야마 개조 내각 |
| 임기 시작 | 1995년8월 8일 |
| 임기 종료 | 1995년11월 13일 |
| 직책 | 제62대 운수대신 / 신도쿄 국제공항 문제 담당 대신 |
| 내각 | 제1차 가이후 내각 |
| 임기 시작 | 1989년8월 10일 |
| 임기 종료 | 1990년2월 28일 |
| 직책 | 제49대 건설대신 |
| 내각 | 제2차 나카소네 제2차 개조 내각 |
| 임기 시작 | 1985년12월 28일 |
| 임기 종료 | 1986년7월 22일 |
| 의정 활동 | |
| 직책 | 중의원 의원 |
| 선거구 | (구 미야자키 1구 →) 미야자키 2구 |
| 당선 횟수 | 10회 |
| 임기 시작 | 1969년12월 28일 - 1990년1월 24일 / 1993년7월 19일 |
| 임기 종료 | 2003년10월 10일 |
| 직책 | 미야자키현의회 의원 |
| 당선 횟수 | 3회 |
| 기타 정보 | |
| 기타 직책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28・30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재: 나카소네 야스히로) (1983년 - 1984년) / (총재: 나카소네 야스히로) (1984년 - 1985년) |
2. 생애
에토 다카미는 미야자키현 휴가시 출신의 일본 정치인이다. 미야자키현 의회 의원을 거쳐 1969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청람회 결성에 참여하고, 여러 내각에서 각료를 역임했다.
1985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에서 건설상, 1989년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 운수상, 1995년 무라야마 내각 (개조)에서 총무청 장관을 역임했다. 1995년 총무청 장관 시절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어 사임했다.
1999년 가메이 시즈카 등과 지수회를 결성했다. 2003년 정계 은퇴 전까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도로공단 민영화에 반대하며 '저항 세력'으로 불렸다.
2007년 11월 22일, 베트남 호찌민시의 한 호텔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그의 생애를 연도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연도 | 내용 |
|---|---|
| 1925년 | 미야자키현 휴가시에서 출생 |
| 1942년 | 구제 도미타카 실업학교 졸업 |
| 1947년 | 미야자키 농림 전문학교 수의축산학과 졸업 |
| 1959년 | 미야자키현 의회 의원 (3선) |
| 1969년 | 중의원 총선 첫 당선 (총 10회 당선) |
| 1973년 | 청람회 참가 |
| 1974년 | 농림정무차관 |
| 1976년 | 국토정무차관 |
| 1983년 |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
| 1985년 | 건설 대신 |
| 1989년 | 자민당 간사장 대리, 운수 대신 |
| 1990년 | 중의원 총선 낙선 |
| 1993년 | 중의원 총선 재당선 |
| 1995년 | 총무청 장관 (발언 문제로 사임) |
| 1998년 |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 |
| 1999년 | 지수회 결성 |
| 2003년 | 정계 은퇴 |
| 2004년 | 가도가와정 명예정민 칭호 |
| 2007년 | 베트남에서 사망 |
2. 1.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1925년 4월 10일 미야자키현 휴가시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토가 태어날 당시에는 세계 공황의 영향으로 집안이 매우 어려웠고, 그로 인해 에토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다른 지역에 가서 하루에 55전을 받으며 일을 해야 했다. 이후 구제 도미타카 실업학교(지금의 미야자키현립 가도가와 고등학교)를 거쳐 1947년 구제 미야자키 농림 전문학교(지금의 미야자키 대학)를 졸업했다.[33]1955년 미야자키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현의원을 지냈고 이후 3선을 역임했다.
1969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33] 이후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 1973년 나카가와 이치로가 주최한 청람회 결성에 이시하라 신타로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33] 1974년 농림정무차관, 1976년 국토정무차관을 거쳐 1983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당내에서 영향력 있는 의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 2. 중의원 의원 활동 및 각료 역임
에토 다카미는 1969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33] 1973년에는 나카가와 이치로가 주최한 청람회 결성에 이시하라 신타로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33] 1974년 농림정무차관, 1976년 국토정무차관을 거쳐 1983년에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하여 당인파 의원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1985년 12월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에서 건설상으로 처음 입각하여 7개월간 재임했다.[33] 1989년 6월 우노 내각에서 간사장 대리가 되었지만, 곧 이어진 참원선에서 일본사회당의 마돈나 선풍, 우노 소스케 총리의 게이샤 스캔들, 소비세 도입 논란, 리크루트 사건 등이 겹치면서 자민당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참패를 당했다.
1989년 8월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 운수상으로 입각하여 4개월간 재임했다.[33] 이 때 총선을 치렀는데, 현직 운수상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잦은 나리타 국제공항 2기 공사 현지 시찰과 다른 후보 지원 유세로 인해 정작 자신의 선거구 관리에 소홀했던 것이 패인이었다. 이후 1993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1995년 8월 무라야마 내각 (개조)에서 총무청 장관으로 취임했지만,[33] 11월에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다"라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고 사임했다.[3] 1998년 총재 선거에서는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했지만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그 해 11월 3일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34]
1999년 3월, 가메이 시즈카 등과 함께 일본 국민의 정신문화 재구축, 신중함과 품격이 있는 일본인 본래의 국민성의 부활을 표방하며 지수회를 결성했다.[35] 2000년에는 자민당 종합농정조사회 최고고문 겸 대책본부장으로서 구제역 조사를 진두지휘했다.[36][37][38]
2001년 총재 선거에서 에토는 가메이를 지지했지만, 가메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9개항의 정책 협정을 맺고 후보를 사퇴했다. 고이즈미가 당선된 후, 에토는 고이즈미의 인사 방식에 항의하며 히라누마 다케오의 정조회장 취임을 무산시키기도 했다.[39]
이후 고이즈미가 도로공단 민영화를 주장하자, 에토는 도로족의원으로서 일본의 우정민영화에 반대한 가메이와 함께 저항 세력으로 규정되었다. 에토는 고이즈미와 경제재정정책상 다케나카 헤이조를 '미국 물을 먹은 미숙한 무리들'이라며 비난했다.[39][35]
2003년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33]
| 직책 | 기간 |
|---|---|
| 농림정무차관 | 1974년 |
| 국토정무차관 | 1976년 |
|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 1983년 |
| 건설 대신 | 1985년 12월 ~ 1986년 7월 |
| 자민당 간사장 대리 | 1989년 6월 |
| 운수 대신 | 1989년 8월 ~ 1990년 2월 |
| 총무청 장관 | 1995년 8월 ~ 1995년 11월 |
2. 3. 파벌 활동 및 정계 은퇴
1999년 3월 가메이 시즈카 등과 함께 일본 국민의 정신문화 재구축, 신중함과 품격이 있는 일본인 본래의 국민성 부활을 표방하며 새로운 파벌인 지수회를 결성했다.[35] 2000년에는 자유민주당 종합농정조사회 최고고문 겸 대책본부장으로서 구제역 조사를 진두지휘했다.[36][37][38]2001년 총재 선거에서 에토는 가메이를 지지했지만, 의원 표결 전에 가메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9개항의 정책 협정을 맺고 후보를 사퇴했다. 고이즈미가 당선된 다음 날, 에토, 모리 요시로, 가메이가 회동했을 때 지수회 소속 히라누마 다케오가 가메이에게 전화를 걸어 정조회장직을 제안받았다고 보고했다. 가메이가 고이즈미와 맺은 9개항의 정책 협정에는 인사 상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이즈미가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인사를 결정했기 때문에 가메이는 화가 났다. 하지만 히라누마라면 괜찮다고 생각해 이를 수용하려 했다. 그러나 에토가 전화를 빼앗아 화를 내며 거절하여 히라누마는 정조회장에 취임하지 못했다. 히라누마는 대신 경제산업상이 되었으며 정조회장 자리는 아소 다로에게 돌아갔다.[39]
이후 고이즈미가 도로공단 민영화를 주장하자 에토는 도로족 의원으로서 강하게 반발했다. 고이즈미는 일본의 우정민영화에 맹렬히 반대한 가메이와 함께 에토를 저항 세력으로 규정했다. 에토도 이에 맞서 고이즈미와 경제재정정책상 다케나카 헤이조를 '미국 물을 먹은 미숙한 무리들'이라고 비난했다.[39][35]
2003년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33]
2. 4. 사망
江藤 隆美|에토 다카미일본어는 2007년 11월 22일 베트남 호찌민시의 한 호텔에서 자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40] 향년 82세였다.[40]3. 정책 및 활동
자민당을 대표하는 매파 의원이었으며 나카소네파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 우노 소스케, 후지나미 다카오, 야마사키 다쿠 등과 함께 간부로서 상당한 발언력을 가졌다. 정책과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후 세이와 정책연구회를 이탈한 가메이 시즈카와 손을 잡아 지수회를 창설하면서 지수회 소속이 되었다.[8]
1999년 7월, 지수회 공동 회장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가 참의원 의원회장이 되면서 회장직을 내려놓자, 가메이가 단독 회장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가메이는 야마나카 사다노리, 나카야마 마사아키와 같은 완고한 중진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며 에토에게 공동 회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에토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가메이가 지원을 약속하며 제안을 받아들여 공동 회장이 되었다.[8] 이후 지수회는 에토·가메이 파벌로 불렸으며, 2003년 에토가 은퇴한 후에는 가메이가 단독 회장이 되었다.
에토의 아들인 에토 다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3] 그는 일본회의 소속으로, 일본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고 일본군 위안부('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등 역사 수정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5][6]
3. 1. 나리타 공항 문제
1989년 11월 30일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아쓰타파로부터 공개 질문서를 받은 에토 다카미는 당시 운수 대신으로서 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해 "지역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이 문제 장기화의 원인"이라고 답변하고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문서를 보냈다. 그리고 12월 4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운수 대신이 공개적으로 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39]에토는 1990년 1월 30일 현지를 방문했다. 반대 동맹 아쓰타파 주민들은 에토가 농민 출신이기에 "에토는 반드시 도게자해서 사과를 할 거다", "그 녀석은 그걸 할 수 있는 남자다", "녀석이 먼저 도게자를 하면 우리가 불리해진다"라고 예상하고, 반대 동맹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퍼포먼스로서 자신들이 먼저 도게자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관용차가 아닌 라이트 밴을 타고 나타난 에토를 보고 주민들은 순간 당황했다.[43] 하지만 계획대로 노인들이 도로에 뛰어들어 도게자를 하면서 '더 이상 농민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호소하자 에토도 무릎을 꿇고 노인들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후 비가 오고 있었음에도 농가를 돌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후 요코보리공민관에서 농민들과 회담이 이어졌다. 에토가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자신이 지겠다고 하자 한 농민이 "아무나 데바보초를 가져와라. 대신의 배를 갈라보자고"라고 응대했으며, 에토가 나리타 공항의 상황을 설명하려 하자 한 농민이 "전차를 끌고 가서 짓밟아버리겠다"라고 하는 등 격렬한 상황이 1시간 30분 정도 이어졌다. 회담 자체는 평행선을 달렸지만, 현직 운수상이 직접 농민들과 대화를 한 것 자체가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으며, 회담에 참여했던 청년행동대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 중 일부는 진심을 말하는 에토에게 나쁜 인상을 받지 않았다고도 말했다.[41]
이 회담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에토는 낙선했지만, 이후에도 운수상을 사임하기 직전까지 정부의 성의를 보이고 싶다며 반대동맹 오가와파의 대표 오가와 가키치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가와는 에토를 2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뒤 끝내 만나주지 않았지만, 이후 오가와는 1996년에 신도쿄국제공항공단의 용지 매각에 응해서 반대 투쟁을 끝냈다.[46]
현역 운수상이 반대파 주민들과 대화하기 위해 현지를 직접 찾은 건 에토가 처음이었고 그 덕에 대화의 실마리를 제공했단 점에서 반대동맹 아쓰타파 사무국장은 에토를 나리타 문제 최대의 공로자로 평했다.[47] 1993년 총선에서 에토가 다시 당선되자 공항 주변의 주민들 50명이 당선을 축하하는 모임을 열었고, 에토가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을 때도 축하연을 열었다. 에토가 정계를 은퇴하자 아쓰타파는 에토를 초대해 위로회를 열어주었다.[47]
3. 2. 기타 정책
에토 다카미는 자민당을 대표하는 매파 의원 중 한 명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이끌었던 정책과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나카소네파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 우노 소스케, 후지나미 다카오, 야마사키 다쿠 등과 함께 간부로서 상당한 발언력을 가졌다.[8] 이후 세이와 정책연구회를 이탈한 가메이 시즈카와 손을 잡아 지수회를 창설한 뒤에는 지수회 소속이 되었다.1999년 7월, 지수회 공동 회장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가 참의원 의원회장이 되면서 회장직을 내려놓자, 가메이가 단독 회장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가메이는 야마나카 사다노리, 나카야마 마사아키와 같은 완고한 중진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며 에토에게 공동 회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에토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한 차례 거절했지만, 가메이가 지원하겠다고 하자 제안을 받아들여 공동 회장이 되었다.[8] 이후 지수회는 에토·가메이 파벌로 불렸으며, 2003년 에토가 은퇴한 후에는 가메이가 단독 회장이 되었다.
에토의 아들인 에토 다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3] 에토 다쿠는 일본회의 소속으로, 일본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고 일본군 위안부('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등 역사 수정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5][6]
4. 논란
에토 다카미는 역사 수정주의적 견해와 일본의 전쟁 범죄 부정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1995년,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면서 철도, 도로, 학교를 건설하는 등 "몇 가지 좋은 일"을 했다고 발언하여 장관직에서 사임했다.[3] 이 발언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 내각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 간의 정상 회담을 취소할 위기에 놓이게 했다.[3]
또한 에토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옹호하며, 이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3] 그는 "''왜 국가 간 조약을 침략이라고 부르는가?...그것이 읍과 면의 합병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말했으며, [3] 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3]
에토는 난징 대학살이 날조라고 간주하며 난징 대학살 부정을 했다.[4] 그의 아들인 에토 다쿠는 일본회의에 소속되어 있으며, 일본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고 있다.[5][6]
4. 1.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
1995년 10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한일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어 실시된 것"이라는 정부 견해를 밝히자, 한 기자가 총무청 장관이던 에토에게 질문했다. 에토는 "여기서부턴 잡담이다. 기사에 쓸 얘기는 아니고 메모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라며 "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발언이었지만, 월간지 『센타쿠』가 에토의 실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에토의 발언을 폭언이란 제목으로 기사화했다. 그리고 이를 대한민국의 『동아일보』가 「에토 장관의 망언」이라며 에토를 지명해 보도하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48]일본 언론에서 에토에게 오프 더 레코드 해제를 요구했으나 에토는 이를 거절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에토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비판 여론이 거세졌고, 옴진리교 사건을 계기로 제출된 「종교법인법」 개정 심의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자 결국 장관직을 사임했다.[48] 이 무렵 오키나와현지사 오타 마사히데가 미군 군용지 강제 사용 절차에 대한 대리 서명을 거부한 사건(오키나와 대리 서명 소송)이 발생했는데, 이 과정에서 호슈야마 노보루 방위시설청 장관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총리를 향해 멍청하다고 비판했다가 사임하는 일이 발생해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논쟁도 커져갔다.
이후 에토는 2003년 7월 12일 후쿠이시에서 열린 강연에서 일본이 과거에 일으킨 전쟁이 모두 정당하지는 않다면서도 "침략 전쟁이었다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나라가 나쁘다고 말해 왔다"라며 일본 총리들의 사과를 비판했다.[49] 한일병합조약에 대해 "양국이 조인하고 국련이 조건 없이 승인했다"라고 발언했으며[50][51] (국제연맹은 1920년, 국제연합은 1945년에 발족했으며,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에 체결되었다)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난징 대학살이 30만 명 정도라는 것은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49][51] 에토의 발언에 대해 한국과 중국 양국과 야당은 강력하게 반발했다.[51][52][53]
에토는 역사 수정주의적 견해와 일본의 전쟁 범죄 부정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1995년,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면서 철도, 도로, 학교를 건설하는 등 "몇 가지 좋은 일"을 했다고 발언한 후 장관직에서 사임했다.[3] 에토의 발언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 정부는 에토의 발언에 반대했다)과 일본 내각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연립 정부를 이끌던 사회주의자와의 중요한 정상 회담을 취소할 위기에 놓이게 했다.[3]
또한 에토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옹호하며, 이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3] 그는 연설에서 "''왜 국가 간 조약을 침략이라고 부르는가?...그것이 읍과 면의 합병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말했다.[3] 에토는 또한 학교 교과서에서 소위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위안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성 노예로 강요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여성이었다.[3]
에토는 난징 대학살이 날조라고 간주하며 난징 대학살 부정을 했다.[4]
4. 2. 오프 더 레코드 논란
1995년 10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한일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어 실시된 것"이라는 정부 견해를 밝혔다. 이에 한 기자가 총무청 장관이던 에토에게 질문을 하자 에토는 "여기서부턴 잡담이다. 기사에 쓸 얘기는 아니고 메모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젊은 여러분께 참고삼아 말씀드린다"라며 "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발언이었지만, 회원제 월간지 『센타쿠』가 에토의 실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에토의 발언을 폭언이란 제목을 달아 기사로 썼다. 그리고 이를 대한민국의 『동아일보』가 「에토 장관의 망언」이라며 에토를 지명해 보도를 내면서 순식간에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48]이에 일본의 언론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해제해줄 것을 에토에게 요구했으나 에토는 이를 거절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에토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며 성토하는 여론이 빗발쳤고 옴진리교 사건을 계기로 제출된 「종교법인법」 개정 심의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자 에토는 장관을 사임했다.[48] 이 무렵 오키나와현지사 오타 마사히데가 미국 군용지 강제 사용 절차에 대한 대리 서명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방위시설청 장관 호슈야마 노보루가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총리대신을 향해 멍청하다고 비판했다가 사임하는 일이 발생해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논쟁도 커져갔다.
이후 에토는 2003년 7월 12일 후쿠이시에서 열린 강연에서 일본이 과거에 일으킨 전쟁이 모두 정당하지는 않다면서도 "침략 전쟁이었다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나라가 나쁘다고 말해 왔다"라며 일본의 총리대신들이 이에 대해 사과한 것을 비판했다.[49] 「한일병합조약」에 대해 "양국이 조인하고 국련이 조건 없이 승인했다"라고 발언했으며[50][51](국제연맹은 1920년, 국제연합은 1945년에 발족한 기구이며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에 체결된 것이다)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난징 대학살이 30만 명 정도라는 것은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49][51] 에토의 발언에 대해 한중 양국과 야당은 강력하게 반발했다.[51][52][53]
5. 역대 선거 기록
| 선거명 | 회차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당선 여부 | 선거 제도 |
|---|---|---|---|---|---|---|---|---|
| 1969년 총선거 | 32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무소속 | 76,257표 | 25.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2년 총선거 | 33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3,434표 | 21.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6년 총선거 | 34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0,611표 | 18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9년 총선거 | 35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2,070표 | 19.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0년 총선거 | 36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91,404표 | 22.9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3년 총선거 | 37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84,419표 | 21.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6년 총선거 | 38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24,557표 | 29.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0년 총선거 | 39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1,661표 | 23.7 | 4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 1993년 총선거 | 40회 | 미야자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44,699표 | 35.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6년 총선거 | 41회 | 미야자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6,858표 | 55.48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 2000년 총선거 | 42회 | 미야자키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31,725표 | 66.55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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